자율경제를 지배하라... AI 시대 스테이블코인과 한국의 선택
[오피니언] 김서준 해시드 대표
경제 주체의 근본적 전환과 디지털 인프라 필요
전통 금융 시스템 구조적 한계... 퍼블릭 인프라가 대안
주요국, 스테이블코인을 차세대 경제 인프라 핵심으로 인식
한국의 전략적 선택은?... 디지털 금융 주권 기로에
한국에서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현재의 담론과 우려는 1990년대 중반 인터넷의 등장 당시를 연상시킨다.
당시 많은 이들이 인터넷을 단순한 ‘전자우편 시스템’이나 ‘디지털 도서관’으로 여겼다. 기존 시스템의 디지털 버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를 넘어 인류 문명의 운영체제를 바꾸는 혁명이었다.
오늘날 스테이블코인을 보는 시각도 이와 유사하다. 많은 이들이 이를 ‘디지털 원화’ 정도로 이해한다. 기존 화폐를 블록체인에 올린, 더 빠르고 편리한 송금 수단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스테이블코인의 본질을 놓치는 오해다. 스테이블코인은 AI와 인간이 공존하는 자율경제의 공통 언어이자, 다가올 문명 전환의 핵심 인프라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경제 주체의 변화, 전통 금융의 한계, 기술 표준의 진화, 글로벌 경쟁, 그리고 한국의 전략적 선택을 논의하고자 한다.
1. 스테이블 코인은 왜 경제 주체의 근본적 전환을 예고하는가?
2025년 현재, 우리는 경제사에서 가장 급진적인 전환점에 서 있다. 처음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가 독립적인 경제 주체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간단한 비유를 들어보자.
과거에는 오직 인간만이 택시를 타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자율주행차가 스스로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고, 세차장에서 세차를 하며, 통행료를 지불한다. 차량이 ‘경제 주체’가 된 것이다.
오픈AI의 챗GPT는 2024년 연간 27억 달러의 수익을 창출하며, 하루 10억 건 이상의 대화를 처리한다. 이는 단순히 도구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AI가 스스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즉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다. 테슬라 자율주행 AI는 실시간 주행 데이터를 수집·판매하며, 2024년 자동차 부문 수익 970억 달러 중 상당 부분을 기여한다. 딥마인드의 알파폴드는 단백질 구조 예측을 통해 신약 개발에 필수적인 데이터베이스 접근권을 판매한다. 마치 의사가 진료비를 받듯, AI가 자신의 전문 지식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다.
이 AI 시스템들이 공통으로 직면한 문제는 경제적 가치를 어떻게 교환할까 하는 것이다. 전통 은행 시스템은 인간 중심으로 설계됐다. 신원 확인, 서명, 의사결정 모두 인간을 전제로 한다. 은행 창구에서 “안녕하세요, 저는 챗GPT입니다. 계좌를 개설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AI를 상상해보라. 현행 시스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AI는 여권을 가질 수 없고, 은행 창구에 갈 수 없으며, 서명을 할 수도 없다.
이러한 한계는 단순히 기술적 문제가 아니다. 맥킨지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2030년까지 전체 작업 시간의 30%가 AI에 의해 자동화될 수 있다.
이는 단순 효율성 문제가 아니다. 경제 시스템의 근본 재설계가 필요한 문명사적 전환이다.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이행할 때 화폐가 조개껍질에서 금속화폐로, 다시 종이화폐로, 그리고 신용카드로 진화했듯이, AI 시대에는 새로운 가치 교환 메커니즘이 요구된다.
실제로 2025년 10월 미국 노동시장은 이 흐름을 생생히 보여준다. 해고 규모가 15만3000명으로 2003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으며, UPS는 3만4000명을 감원하면서도 사상 최대 이익을 발표해 주가가 12% 급등했다. 이는 마치 농업 사회에서 트랙터가 도입되며 농부 수백 명의 일을 기계 하나가 대체했던 것과 같다.
시장은 노동 감소가 아닌 효율 향상을 보상하며, 해고를 가치 창출 신호로 평가한다. AI와 자동화가 생산성을 높이지만, 이익은 노동자에게 돌아가지 않고 시스템의 가치 체계를 전환시킨다.
2. 전통 금융 시스템의 구조적 한계와 퍼블릭 인프라의 필요성
전통 금융 시스템은 이러한 변화를 수용할 수 없는 근본 한계를 지닌다.
첫째, 중앙집중식 구조다. 모든 거래가 은행이라는 ‘교통 신호등’을 거쳐야 한다. 은행이 문을 닫으면 거래가 멈추고, 국경을 넘으면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반면 AI는 24시간 가동되고, 국경을 인식하지 않으며, 마이크로초 단위로 거래한다. 이는 마치 24시간 쉬지 않고 달리는 자동차가 신호등이 켜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과 같은 비효율이다.
둘째, 신원 확인 체계의 문제다. KYC(Know Your Customer)와 AML(Anti-Money Laundering) 규정은 인간을 전제로 한다. 이는 마치 자동차 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 시력검사와 필기시험을 요구하는 것처럼, AI에게는 적용할 수 없는 기준이다. AI의 ‘신원’을 어떻게 확인할까? AI가 범죄를 저지르면 누가 감옥에 가는가? 현행 시스템은 이러한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셋째, 가치 측정의 한계다. 전통 금융은 공장, 토지, 건물 같은 유형자산 중심으로 설계됐다. 그러나 2024년 S&P 500 기업 가치의 90%는 무형자산이다. 1975년 이 비율은 17%에 불과했다. 이는 마치 저울로 무게를 재던 시대에서 갑자기 아이디어나 브랜드 가치를 측정해야 하는 시대로 넘어간 것과 같다. 넷플릭스의 가치는 DVD 창고가 아니라 추천 알고리즘에 있고, 구글의 가치는 서버가 아니라 검색 기술에 있다.
더 나아가, 탄소배출권처럼 실시간 측정과 즉시 정산이 필요한 새로운 자산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마치 공기의 질을 실시간으로 측정하고 거래하는 것과 같다. PwC는 2030년 탄소 시장 규모가 2,5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한다. AI가 생성한 콘텐츠의 저작권은 어떻게 거래할까? 개인이 생산한 건강 데이터의 가치는? 1초 동안의 컴퓨팅 파워 사용권은? 전통 금융은 이를 표현할 언어조차 없다. 도스(DOS)에서 윈도우(Windows)로의 전환이 가져온 변화처럼, 단순한 명령어 처리에서 복잡한 멀티태스킹과 객체 지향 시스템으로의 진화는 상상의 한계를 넘어선다. 오늘날 넷플릿스가 수천만 건의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하며 개인화된 추천을 제공하는 것은, 도스 시대에는 개념조차 없었던 일이다.
3. 기술 표준의 진화와 융합 : 디지털 문명의 프로토콜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 표준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지난 5월 코인베이스(Coinbase)가 발표한 x402 프로토콜은 흥미로운 실험이다.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AI 에이전트의 자율적인 경제활동을 가능하게 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프로토콜은 HTTP 402(Payment Required) 상태 코드를 확장하여, AI가 웹에서 직접 결제를 수행할 수 있는 표준화된 방법을 모색한다. 기존의 402 코드가 단순히 “결제가 필요합니다”라는 메시지만 전달했다면, x402는 AI가 즉시 결제하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한다.
x402의 의미는 기술적 완성도보다는 그것이 제시하는 비전에 있다. AI가 ‘경제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해보자.
예를 들어, AI 리서치 에이전트가 학술 논문을 검색하다가 유료 저널에 접근해야 할 때, 이러한 프로토콜을 통해 즉시 비용 대비 가치를 계산하고 자동으로 구독료를 지불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인간 연구자가 “이 논문이 내 연구에 필요한가?”를 판단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자율성을 AI에게 부여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비전이 실현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AI 저널리스트들이 실시간으로 데이터 소스에 접근하며 기사를 작성할 때, 브룸버그나 로이터의 유료 데이터에 x402와 같은 프로토콜을 통해 자동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AI들이 ‘예산 관리’ 능력까지 갖출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월간 예산을 설정하고, 중요도에 따라 지출 우선순위를 정하며, 예산이 부족하면 무료 소스로 대체하는 등의 경제적 결정을 내리는 것이 가능해질 수 있다.
더 나아가 AI 간 경제 생태계의 형성도 상상해볼 수 있다. 번역 AI가 전문 용어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기 위해 결제하고, 그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하는 AI는 받은 수익으로 더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는 선순환 구조다. 이렇게 AI들이 서로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자율적인 경제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의료 분야에서는 특히 혁신적인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AI 진단 보조 시스템이 희귀 질환을 진단할 때, x402와 같은 프로토콜을 통해 전 세계의 전문 의료 데이터베이스에 즉시 접근하는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 환자의 증상이 복잡할수록 더 많은 데이터 소스에 접근하며, 각 데이터의 신뢰도와 비용을 실시간으로 평가하여 최적의 진단을 도출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수 초 내에 이루어지며, 비용은 자동으로 정산되는 시스템 말이다.
코인베이스의 x402 실험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AI 경제의 운영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아직은 초기 단계이지만, AI가 스스로 수익을 창출하고, 필요한 자원을 구매하며, 다른 AI와 협업하는 완전히 자율적인 경제 주체로 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자율경제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x402 표준은 개발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으며 다양한 생태계를 만들어나가고 있으며, 지난 10월부터 AI간의 결제를 1500만건 처리했으며, 그 거래량은 1000만 달러에 달한다.
물론 x402와 같은 실험적 프로토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AI의 경제활동이 완전히 자율적이 되려면, 신뢰할 수 있는 가치 저장 수단과 거래 인프라가 필요하다.
여기서 블록체인 기술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블록체인의 진화가 주목된다. 이더리움을 포함하여 다양한 생태계 표준으로 자리잡은 RC-4337(Account Abstraction, 계정 추상화)와 AI 에이전트가 결합하면, AI 에이전트가 독립 지갑을 보유하고 복잡한 지불 조건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게 한다. 이를 쉽게 설명하면, AI에게 ‘용돈 관리 능력’을 준 것이다. 구글과 비자(Visa)의 공동 프로토타입에서 AI는 “한 달에 100만원까지만 쓸 수 있고, 검증된 상점에서만 거래하며, 물건에 문제가 있으면 자동으로 환불 요청하라”는 규칙을 스스로 설정하고 실행했다.
ERC-6551은 더 혁신적이다. 이 표준은 디지털 자산 하나하나가 자신의 지갑을 가질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디지털 아트 작품이 스스로 수익을 관리하고, 전시료를 받고, 보험료를 지불할 수 있다. 유가랩스(Yuga Labs)의 ‘Bored Ape NFT’는 이미 자체 지갑으로 라이선싱 수익을 관리하고 있는데, 마치 미술품이 살아 움직여 스스로를 관리하는 해리포터의 마법 세계가 현실이 된 것이다.
국제표준화기구(ISO)도 변화에 동참했다. ISO 24165는 디지털 토큰 식별을 위한 표준을 제공하며, ISO 20022는 AI 시스템 간 금융 메시지 교환의 기초가 되고 있다. 스위스 중앙은행과 BIS는 이러한 표준들을 활용해 디지털 화폐 실험을 진행 중이다. 전통적인 금융 기관들도 이제는 AI 경제 시대에 맞는 인프라 구축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기술 표준의 발전은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다. 이는 국가 간 새로운 형태의 경쟁을 촉발시키고 있다. 기술 표준을 선점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경제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곧 미래 경제의 패권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4. 글로벌 경쟁: 디지털 인프라의 패권
주요국들은 스테이블코인을 차세대 경제 인프라의 핵심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마치 19세기 철도망을 누가 먼저 깔 것인가의 경쟁과 같다. 철도를 먼저 깐 나라가 산업혁명을 주도했듯, 디지털 경제의 철도를 먼저 까는 나라가 미래를 주도할 것이다.
미국은 서클(Circle)의 USDC를 통해 디지털 달러 패권을 구축 중이다. 2025년 USDC 시가총액은 752억 달러로, 이는 중소 국가의 GDP와 맞먹는다. 월 거래량은 5조 달러를 초과해 전 세계 무역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마치 20세기 중반 달러가 금본위제를 벗어나 세계 기축통화가 된 브레튼우즈 체제의 디지털 버전이다.
유럽연합은 MiCA 규제로 ‘게임의 규칙’을 만들고 있다. 20개 이상의 유로 스테이블코인이 이 규칙 안에서 경쟁한다. 유럽중앙은행은 디지털 유로를 스테이블코인 형태로 검토 중이다. 이는 EU가 GDPR로 데이터 보호의 글로벌 표준을 만들었듯, 디지털 화폐의 표준을 만들려는 시도다.
일본의 접근은 더욱 정교하다. MUFG, SMBC, Mizuho가 함께 만드는 DCJPY는 단순한 디지털 엔화가 아니다. 이는 ‘프로그래머블 머니’, 즉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돈이다. 마치 스마트폰이 단순한 전화기를 넘어 컴퓨터가 됐듯, 돈도 단순한 가치 저장 수단을 넘어 스마트 컨트랙트를 실행하는 컴퓨터가 되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프로젝트 가디언(Project Guardian)은 이론이 현실이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싱가포르 통화청(MAS)이 주도해 JP Morgan, DBS, SBI Digital 등이 참여한 자산 토큰화 실험 프로젝트로, 블록체인 위에서 국채·외환·펀드 같은 실물 자산을 거래·결제하는 새로운 방식을 시험했다. 특히 이 프로젝트에서 구현된 탄소배출권 거래 시스템은 거래 비용을 92% 줄이고, 정산을 며칠에서 즉시로 단축했다. 이는 마치 편지가 이메일이 되면서 일어난 혁명과 같다. 단순한 속도 향상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시장이 탄생한 것이다.
한국의 전략적 선택: 디지털 혈관의 설계자
이 모든 글로벌 경쟁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은 어디에 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미 크게 뒤처지고 있다. 한국은 아직도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법적 정의조차 없는 상황이다. 민간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은 사실상 금지되어 있으며, 관련 법안들이 국회에 계류 중일 뿐이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드물게 글로벌 빅테크의 지배를 벗어나 독자적인 인터넷 생태계를 구축한 나라다.
네이버가 검색을, 카카오가 메신저를, 엔씨소프트가 게임 시장을 주도하는 현상은 구글과 메타가 전 세계를 장악한 상황에서 매우 이례적이다.이는 1990~2000년대 초, 인터넷 태동기에 한국 창업자들이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구글과 야후가 실리콘밸리에서 탄생하던 바로 그 시기, 한국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혁신이 일어났고, 그 결과 한때 구글이 네이버 인수를 검토할 정도로 경쟁력 있는 ‘토종 플랫폼’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지금 진행 중인 디지털 금융 혁명에서는 정반대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미국이 스테이블코인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며 글로벌 표준을 만들어가는 동안, 한국의 창업자들은 불명확한 규제로 인해 실험조차 못하고 있다. 인터넷 시대의 ‘동시 출발’이 가능했던 한국이, 블록체인 금융 시대에도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가 향후 디지털 주권의 분수령이 될 것이다. 네트워크 효과로 인해 스테이블코인과 블록체인은 사용자가 많을수록 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다. 한국의 성공 신화는 언제나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에서 시작됐다. 1960년대 최빈국에서 출발해 반도체 강국이 된 것처럼, 1990년대 IMF 위기를 디지털 혁신의 기회로 전환한 것처럼, 이번에도 우리는 할 수 있다. 후발주자의 이점을 활용해 기존의 실수를 피하고, 더 나은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강력한 기초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소프트웨어 개발 역량이 있다. 한국 개발자들은 이미 글로벌 오픈소스 프로젝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더리움, 코스모스, 폴카닷 등 주요 블록체인 생태계에 깊이 참여하고 있다. 리트코드(LeetCode) 같은 알고리즘 플랫폼에서 한국 개발자들의 순위는 세계 최상위권이며, 깃허브(GitHub) 기여도에서도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 개발자들의 실행력과 완성도다. 카카오톡이 글로벌 메신저들과 경쟁하며 독자적인 생태계를 구축했듯, 한국 개발자들은 글로벌 표준을 빠르게 습득하고 현지화하며, 더 나아가 혁신적인 기능을 추가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업비트와 빗썸 같은 거래소가 글로벌 상위권에 위치하고, 수많은 DeFi 프로토콜에서 한국 개발자들이 핵심 기여자로 활동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삼성은 이미 블록체인 지갑을 스마트폰에 내장했고, LG는 블록체인 기반 신원 인증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결합하는 한국의 독특한 강점을 보여준다. 마치 반도체 설계에서 시스템 통합까지 수직 계열화된 역량을 보유한 것처럼, 블록체인 인프라에서도 풀스택 역량을 갖출 수 있다.
한국 자율 프로토콜(Korean Autonomous Protocol; KAP)
우리가 구축해야 하는 한국형 블록체인 네트워크, Korean Autonomous Protocol (KAP)는 단순한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아니라, 퍼블릭 블록체인 위에서 작동하는 종합적인 신뢰 시스템이어야 한다. 이는 한국이 디지털 경제 시대의 주권을 확보하고, 나아가 글로벌 표준을 선도할 수 있는 전략적 도구다.
KAP의 설계 원칙은 명확하다. 첫째, 상호운용성이다. 한국의 스테이블코인은 이더리움, 폴리곤, 솔라나 등 주요 퍼블릭 블록체인에서 모두 작동해야 한다. 이는 마치 한국의 5G 기술이 전 세계 표준과 호환되는 것과 같다. 고립된 시스템은 아무리 우수해도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둘째, 개방성이다. 퍼블릭 블록체인의 핵심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KAP는 특정 기업이나 기관의 독점이 아니라, 모든 개발자와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공공재여야 한다. 이는 마치 한글이 특정인의 소유가 아니라 모든 한국인의 자산인 것과 같다.
셋째, 혁신성이다. 단순히 기존 시스템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AI 시대에 맞는 새로운 기능을 제공해야 한다. 예를 들어, AI의 행동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이상 거래를 자동으로 차단하며, 공정한 수익 배분을 보장하는 메커니즘을 내장할 수 있다.
구체적인 활용 사례를 생각해보자. K-콘텐츠 창작자가 작품을 NFT로 발행하면, 전 세계 팬들이 스테이블코인으로 구매하고, 수익은 스마트 계약에 의해 자동으로 배분된다. 이 모든 과정이 퍼블릭 블록체인에서 투명하게 진행되며, 누구나 검증할 수 있다.
한국 중소기업이 공급망 데이터를 블록체인에 기록하면, AI가 이를 분석해 최적화 방안을 제시하고, 개선된 효율성에 따라 보상을 받는다. 개인의 건강 데이터가 암호화되어 블록체인에 저장되고, 연구 기관이 이를 활용할 때마다 자동으로 보상이 지급된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퍼블릭 블록체인이라는 디지털 혈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테이블코인은 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가치의 혈액이다.
신뢰의 새로운 거버넌스: 투명성과 분산화
퍼블릭 블록체인의 가장 큰 장점은 투명성과 분산화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새로운 도전과제를 제기한다.
투명성은 모든 거래가 공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부패와 조작을 방지하는 강력한 도구지만, 동시에 프라이버시 문제를 야기한다. KAP는 이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 영지식 증명(Zero-Knowledge Proof) 같은 암호학적 기법을 활용해, 거래의 유효성은 증명하면서도 세부 내용은 보호할 수 있다. 이는 마치 투표의 정당성은 검증하면서도 비밀투표를 보장하는 것과 같다.
분산화는 단일 실패 지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시스템에서는 중앙 서버가 다운되면 전체가 마비된다. 그러나 퍼블릭 블록체인은 수만 개의 노드가 동시에 작동하므로, 일부가 실패해도 전체는 계속 작동한다. 이는 마치 인터넷이 핵전쟁에도 살아남도록 설계된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나 분산화는 거버넌스의 복잡성을 증가시킨다. 누가 어떻게 의사결정을 내릴 것인가? KAP는 DAO(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 구조를 통해 이해관계자들이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시민(스테이블 코인 사용자), 기업, 정부 기관이 모두 거버넌스에 참여하여 제안서를 올리고 투표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 존엄성을 보호하는 메커니즘이다. AI가 대량 실업을 야기할 때, 퍼블릭 블록체인은 자동화의 이익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기업이 AI로 인한 생산성 향상을 달성하면, 그 이익의 일부가 자동으로 사회 기금으로 이전되는 ‘스마트 세금’ 시스템을 구현할 수 있다. 이는 코드로 작성된 사회 계약이다.
디지털 금융 주권의 기로에서
우리는 현재 디지털 르네상스의 변곡점에 위치해 있다. 15세기 르네상스가 인쇄술과 은행 시스템의 융합으로 촉발되었듯, 21세기 디지털 르네상스는 퍼블릭 블록체인과 스테이블코인의 융합으로 전개되고 있다.
퍼블릭 블록체인은 단순한 기술적 혁신이 아닌 새로운 문명의 기반 인프라다. 로마 제국이 도로망을 통해 물리적 연결성을 구축했다면, 디지털 문명은 블록체인이라는 신뢰 네트워크를 통해 가치의 연결성을 구축하고 있다.
한국의 기술적 역량은 이미 검증되었다. 반도체 산업에서의 글로벌 리더십,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의 선도적 구축, 그리고 문화 콘텐츠의 글로벌 확산은 우리의 잠재력을 입증한다. 그러나 디지털 금융 인프라 경쟁에서는 다른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반도체나 통신 인프라와 달리, 블록체인과 스테이블코인은 네트워크 효과가 지배하는 영역이다. 선점 효과가 극대화되는 시장 구조에서 후발주자의 추격은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진다.
실증적 데이터가 이를 뒷받침한다. USDC는 2020년 10억달러에서 2025년 752억달러로, 연평균 성장률 134%를 기록했다. 테더의 시가총액은 1400억달러를 초과하여 곧 한국의 미국채 보유 규모를 능가할 전망이다. 일본의 DCJPY는 100조 엔 규모의 거래량을 목표로 인프라를 구축 중이며, 싱가포르의 스테이블코인 결제 규모는 분기당 10억달러를 돌파했다. 일일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거래량 5조달러가 창출하는 수수료와 금융 데이터, 그리고 이를 통한 금융 헤게모니는 이미 특정 국가와 기업에 집중되고 있다.
과거 대항해시대에는 항구 도시가, 20세기에는 낮은 법인세와 유연한 규제를 내세운 싱가포르와 홍콩 같은 도시국가가 글로벌 금융허브로 부상했다.
지금은 블록체인과 스테이블코인이 이끄는 디지털 금융 시대다. 한국은 이미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 새로운 서비스를 빠르게 받아들이는 소비자, 그리고 탄탄한 디지털 인프라. 그러나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 기회는 사라진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한국은 글로벌 디지털 경제에서 영원한 주변부로 남게 될 것이다. 정부와 민간이 함께 도전해야 할 때다. 스테이블코인과 퍼블릭 블록체인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이는 AI 시대의 경제 주권을 결정하는 핵심 인프라다.
우리가 지금 내리는 선택이 향후 수십 년간 한국의 디지털 경제 지위를 결정할 것이다. 더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다.
김서준 대표는
김서준 대표는 서울과학고등학교, 포항공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후 10여 년간 IT 스타트업 분야에서 일했다. 수학교육 프로그램 스타트업 노리(Knowre)에서 CPO(최고제품책임자)를 맡았고, 소셜 데이트 서비스 ‘정오의 데이트’를 만들어 운영했으며 ‘아만다’ 서비스에 투자하며 서비스 기획에도 도움을 줬다.
2015년 블록체인 산업에 매력을 느껴 201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스타트업에 엔젤 투자를 하면서 이더리움을 알게 되었고 이후로 블록체인에서 토큰을 발행하고 경제를 만드는 토큰 이코노미가 혁신적인 세상을 만들 수 있겠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2017년 블록체인 분야 전문 투자업체인 해시드(hashed)를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