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모멘트: AI와 협업하는 자각 혁명
[오피니언] 자각과 협업의 순간(이세돌 모멘트)으로 전환해야
내년 3월이면 알파고 쇼크 10주년, 이세돌 9단은 이미 바둑에서 은퇴
AI의 급성장 속도를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공포를 넘어 호기심으로, 대결을 넘어 협업으로. 이것이 AI 시대의 승자가 되는 길
지난 2016년 3월, 서울의 봄은 유난히 쌀쌀했지만 광화문의 열기는 뜨거웠다.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알파고와 인간 대표 이세돌 9단의 세기의 대국이 열리던 포시즌스 호텔. 그 충격적 현장을 아직도 기억한다. 첫날 대국이 끝나고 모두가 "내일은 이기겠지"라고 위안했다. 하지만 이틀째, 사흘째도 패배가 이어졌다. 최종 결과는 1승 4패. 그 자리에 있던 약 200명이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그 날의 충격은 시작에 불과함을 직감할 수 있었다.
3,000년 이상 된 인류 최고(最古)급 두뇌 게임인 '바둑'에서 AI의 능력이 인간을 초월했다. 인간의 직관과 창의성이라 믿었던 성역이 무너지는 순간, 전 세계는 전율했다. 우리는 그 충격의 순간을 '알파고 모멘트'라 부른다.
이후 이세돌 9단은 "다시 태어나면 바둑은 취미로 즐기고 인공지능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바둑계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예술성이 사라진 답안지 같은 바둑에 회의를 느껴 은퇴를 결심했지만, 은퇴 후 오히려 생성형 인공지능을 공부하고 있다.
내년 3월이면 알파고-이세돌 세기의 대결 10년이 된다.
2026년을 앞두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새로운 전환점, 즉 '이세돌 모멘트'를 발견한다. '알파고 모멘트'가 AI의 압도적 능력 앞에 인간이 무력감을 느끼는 충격의 순간이었다면 '이세돌 모멘트'는 AI의 능력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이를 도구로 삼아 인간의 한계를 확장하려는 자각과 협업의 순간이 되고 있다.
이세돌은 은퇴하며 중요한 통찰을 남겼다. 그는 "아마추어 기사들이 즐기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 좋을 것이다. 수를 둔 뒤 AI를 틀어보면 좋은 수였는지, 안 좋은 수였는지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학습과 성장을 돕는 강력한 파트너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실제로 체스계에서는 AI와 결합한 인간 팀이 AI 단독이나 인간 단독보다 더 강력한 퍼포먼스를 낸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이를 '센타우르 체스'라 부른다.
내년 알파고 대국 10주년을 맞아 알파고와 재대결을 추진하고 있다는 신진서 9단이 실례다. 그는 AI 이전부터 강자였는데, AI를 공부한 뒤로는 절대강자가 됐다. 인공지능을 학습하고 활용하는 능력에 따라 성적이 달라진다.
바둑만의 현상은 아닐 것이다. AI는 어떤 이에게는 한계를 보여주는 거울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더 높이 날아오르는 발판이 된다. 상향평준화가 아니라 격차의 확대. AI 시대의 역설이다.
알파고를 만든 데미스 허사비스는 협업의 가능성과 폭발력을 가장 먼저 간파하고 증명한 인물이다. 알파고 이후 단백질 구조 예측 AI '알파폴드'를 개발해 2024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바둑에서 시작한 신경망 기술이 생명과학의 난제를 풀었다. 알파폴드는 현재 전 세계 200만 명 이상이 사용하며 항생제 내성 연구부터 플라스틱 분해 효소까지 다양한 연구에 활용되고 있다. 바둑판을 떠난 알파고는 인류의 문제를 푸는 도구가 됐다.
허사비스는 "인공지능이 더 이상 인간 지식의 한계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더 강력해졌다고 설명했다. 인간의 가르침이 한계였다는 역설이다.
이것은 인간의 무용함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인간과 AI의 새로운 관계를 제시한다. 인공지능은 매 순간, 기하급수적으로, 스스로 학습한다. 인간은 AI를 가르치는 존재가 아니라 AI와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최근 구글이 '제미나이 2.0'을 공개하며 또 한번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없앤다는 불안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각자의 영역에서 AI가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었다는 '자각'이다. 바둑에서 더이상 AI와 경쟁할 수 없음을 느끼고 은퇴한 이세돌이 "AI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 것은, 바둑의 패배자가 아닌 기술의 주체자로서 다시 서겠다는 의지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AI와 경쟁하여 이기겠다는 무모함이 아니다. AI가 인간을 추월했음을 인정하는 겸허함, 그리고 그 기술을 활용해 나의 능력을 증강시키겠다는 현명함이다. "사고의 확장이 일어나야 한다. 인공지능과 협업해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세돌의 말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다.
인공지능에 유일한 1승을 거둔 인류, 이세돌.
그가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유산은 '신의 한 수'가 아니라, 은퇴 후 보여준 '자각'이다. 공포를 넘어 호기심으로, 대결을 넘어 협업으로.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세돌 모멘트'를 받아들이고, AI 시대의 진정한 승자가 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