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자경험(UX)은 디자인 넘은 '리더십'이다
[장진규의 UX와 리더십]
세상 모든 문제를 풀 것처럼 덤벼드는 스타트업의 비전과 미션을 보고 들으면 언제나 가슴이 뛴다. 필자는 그 때문에 스타트업 투자자로 일한 지 11년차가 됐다. 수 많은 국내외 창업가들을 만나고 투자, 조언하며 기업 경영에 관한 여러가지 생각들을 하게 된다. 특히, 문제 해결을 위한 문제 정의와 근거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어 글로벌(해외) 창업가들 대비 국내 창업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다. 바로,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 이하 UX) 리더십의 부재다.
사용자 경험 혁신은 제품ㆍ서비스를 만드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삼성전자 고 이건희 회장 1993년에 프랑크푸르트를 선언하게 된 계기에는 '경영과 디자인' 이라는 보고서가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디자인 고문으로 있던 후쿠다 다미오가 회사를 그만두기 전 삼성의 문제점을 담은 것으로 ‘후쿠다 보고서’라고도 불린다.
그 보고서에는 삼성 임직원이 공업디자인과 상품디자인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디자인 영역에 관한 문제'를 다뤘다. 해당 리포트 이 후 삼성 사내방송팀이 삼성전자의 세탁기 생산 과정을 촬영한 내부 고발성 영상을 제작했다. 당시 영상에서는 세탁기 플라스틱 뚜껑이 불량으로 생산되어 뚜껑이 잘 닫히지 않았을 때 칼로 접촉면을 깎아내서 조립하는 등의 모습이 담겼다. 당연하게도, 이렇게 생산된 세탁기는 세계 시장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출장을 가 있던 이건희 회장이 이 영상을 보고 화가 나서는 비서실에 전화해 임원 200여명을 모두 독일로 소환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유명한 말을 한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봐."
사용자는 완성된 제품과 서비스를 쓰지만 이를 실제 경험하며 역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세탁기 생산 과정에서 사례처럼, 사용자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문제 해결 방식에 대한 간접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한 좋지 않은 UX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지 않게 만들어버리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UX 디자인은 세탁기 생산 현장에서 칼로 접촉면을 깎아 마감해버리는 제조라인 직원과 같이 IT 업계에서 개발자, 디자이너, 기획자 등 만드는 사람들에 따라 퀄리티(질)에 커다란 차이를 불러온다.
따라서, 창업가는 경영 현장에서 이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체계성을 갖출 수 있도록 사용자 중심의 사고로 경영해야 한다. 즉, 서두에 언급한 세상 모든 문제를 풀 것 같은 비전과 미션을 실제 실현하기 위한 총체적 혁신의 중심에는 바로 UX 디자인이 있다.
문제를 푸는 열쇠, 바로 사용자 중심 사고
이러한 측면에서 기업 월트 디즈니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놀이 동산인 디즈니랜드를 가보면 해당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들(공간 사용자라 할 수 있겠다)이 몰입할 수 있는 UX 요소들로 가득차 있다.
놀이기구의 스토리텔링은 물론이고 도처에 있는 캐릭터들(정확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멤버들)의 인터랙션 방식은 아이들에게 ‘환상의 나라’를 인식시키기에 충분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는 그들이 추구하는 UX의 핵심 가치가 방문자의 즐거움과 기쁨(pleasure & happy)이라는 점을 명확히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스타트업 창업자가 저마다 사용자가 겪는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겠다고 하지만, 정확히 사용자들에게 어떤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인사이트가 없는 경우가 많다.
디즈니가 제시하는 즐거움과 기쁨이 무엇(what)을 드러낸 일종의 비전이라면, 그들은 다양한 UX 요소를 구현함으로써 어떻게(how) 사용자들에게 비전을 전달할 지에 대한 구체적 미션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 경영을 가능하게 하려면 창업자 스스로 사용자 중심의 사고를 해야 한다.
창업자 월트 디즈니는 디즈니 월드를 만들기 위한 일명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1965년에 소개하며 사용자 중심의 경험 설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면모를 보여줬다. 물론 이 프로젝트가 2017년도에 같은 제목으로 나온 영화에서는 다소 부정적인 형태로 소개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UX가 갖는 힘은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닌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게 만든다. 낙후된 올랜도를 꿈과 희망이 있는 도시로 변모하는데 디즈니 월드와 그 속의 UX 디자인이 기여한 영향력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로 나아가는데 사용자 중심의 사고가 발휘하는 힘은 사회와 문화도 바꿀만큼 위대하다.
스타트업 창업자가 가져야 할 UX 리더십
최근 3년 간 CES를 들여다보면 매년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사용자, 그리고 UX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 없이 등장한다. 하나 같이 사용자의 삶과 행동 양식에 변화를 줄 수 있음을 강조한다.
실제 UX는 기업의 경쟁력과 매출에도 직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페이팔은 핀테크 기업의 조상이자 창업 20여년이 지난 현재도 시장 점유율 60%를 유지하며 계속해서 온라인 결제의 미래를 바꿔나가고 있다. 핵심적인 것은 바로 UX다.
개인 수표 등 전통적인 화폐를 취급해 대금을 결제해야 하던 환경에서 이메일 주소만으로 돈을 송금할 수 있는 UX를 설계했다. 이것은 2022년에도 현존하는 여러 송금 및 결제 시스템 중에서도 단연 심플하다.
유사 경쟁사들이 지속적으로 페이팔의 아성을 무너트리려 노력하고 있지만 그들이 견고할 수 있었던 것은 단연 UX임을 UX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알 수 있다.
사용자가 제품이나 서비스를 사용하며 경험하는 차원의 혁신은 단순히 UI 디자인을 잘하거나 몇 가지 아이디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UX는 건축가가 하는 설계의 일과 같이 논리적이고 복합적인 구조 하에 다뤄진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보다 종합적인 관점에서 UX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특히, 스타트업 창업자와 같이 세상의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기 위한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사용자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창업자는 UX를 중심으로 조직 경영을 해나가는 리더십을 발휘해야만 한다.
UX 분야는 소프트웨어 파워가 날로 갈수록 중요해지는 모든 산업 분야에서 엄청난 투자가 필요하다. 실제 애플, 구글,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테슬라, 블룸버그 등 글로벌 기술 기업들은 너도나도 UX를 리서치하는 별도 센터나 조직을 구축하고 매년 투자에 힘을 쏟는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디테일이 성패를 가른다는 기업 성공의 법칙에서 이 디테일은 예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는 더더욱 UX가 책임질 수 밖에 없다.
스마트폰 시대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우리는 글로벌에서 내놓을만한 UX 파워를 갖고 있지 않다. 새로운 혁신 시대에 우리나라 스타트업 창업자들과 대기업 경영진들이 UX 리더십을 갖고 UX에 대한 가치의 이해와 투자가 절실하다.
장진규 의장ㆍHCI 박사
장진규 의장은 세계 최초의 UX 리서치 중심 컴퍼니 빌더인 컴패노이드 랩스를 이끌고, 예비 및 초기 스타트업의 컴퍼니 빌딩과 UX 혁신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HCI 분야 젊은 연구자상을 수상하며 학계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스타트업 투자자로서 60여개의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 자문하며 현업에서 UX 분야 전문가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연세대학교에서 인지과학 및 HCI 분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교수,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HCI 분야 연구실장을 역임했습니다.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 혁신에 기여한 공로로 2020년 보건복지부 장관표창을 받았습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 서울아산병원 자문위원, VC, 스타트업 투자사 등에서 벤처 파트너 및 자문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스타트업 리더십: 위대한 기업을 향한 여정 (2022년 출간 예정)>, <차세대 HCI 개론 (2022년 출간 예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