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5조 반도체 투자, 작은 소재 하나에 멈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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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익 2026.06.29 16:58 PDT
4755조 반도체 투자, 작은 소재 하나에 멈출 수 있다
반도체 소재 및 공급망의 중요성 (출처 : 편집=제미나이)

[집중 분석] 4755조원 투자가 놓쳐선 안 될 것들
WF₆ 같은 특수 가스와 텅스텐 공급망은 반도체 팹의 가동률을 좌우하는 보이지 않는 스위치.
메모리 병목을 잡은 한국... 소재 내재화, 첨단 패키징, HBM 공동설계까지 함께 장악해야
더밀크의 시각: AI 인프라 생태계로의 진화 기회

“AI 반도체 구축(AI semiconductor buildout)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영역은 칩 자체가 아니라 소재다.”

AI 반도체 제조의 진짜 병목은 GPU, 메모리가 아닌 다른 곳에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반도체 전문 리서치 기업 세미애널리시스(SemiAnalysis)는 29일(현지시각) 공식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텅스텐 공급망의 위기를 지적했다. 최근 텅스텐헥사플루오라이드(WF₆, 육불화텅스텐) 공급망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WF₆는 반도체 웨이퍼(반도체 직접회로의 재료인 둥근 원판) 위에 텅스텐 박막을 증착하는 화학기상증착(CVD) 및 물리기상증착(PVD) 공정에 필수적인 특수 가스다. 메모리 반도체 일종인 3D 낸드, HBM(고대역폭메모리) 같이 수직 적층 구조가 복잡할수록 WF₆ 소모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WF₆ 없이는 첨단 반도체 생산이 불가능한 것. 

문제는 전 세계 텅스텐 채굴, 정제 및 분말 생산능력(capacity)의 약 80%를 중국이 압도적으로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미애널리시스는 “올해 중국의 누적(YTD) 텅스텐 금속 분말 수출량이 전년 동기 대비 약 50% 감소했다”며 “이 데이터는 전 세계 반도체 기업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격 압박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공급망 이슈는 메모리 반도체 업계를 이끄는 한국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도 매우 중요한 문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청와대에서 발표한 ‘반도체 AI 분야 4755조원 투자’가 차질 없이 진행되려면 이와 같은 공급망 병목 문제도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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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텅스텐 금속 분말 수출 감소 (출처 : SemiAnalysis, 편집=Gemini)

중국, 일본, 한국의 연결고리… 얼마나 노출돼 있나

중국의 텅스텐 금속 분말 수출 감소는 그것을 재료로 하는 WF₆ 제조기업에 직접적인 타격을 미치고 있다. 일본의 신에츠 화학, 한국의 SK머티리얼즈 등이 WF₆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분석이다. 

세미애널리시스에 따르면 중국으로부터 텅스텐 분말을 수입하는 일본의 텅스텐 분말 수입량이 2026년 들어 급감한 반면, 수입액은 급증했다. 수입량이 줄었음에도 가격이 뛰며 조달에 돈을 더 많이 쓴 셈이다. 이런 상황은 WF₆ 가격에도 영향을 미쳐 한국의 WF₆ 수입 가격이 올해 들어 151% 상승했다. 

미국의 화학 기업 솔루젠의 가우랍 차크라바티 CEO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대만 TSMC는 WF₆의 80%를 일본에서 조달한다. 전 세계 WF₆ 생산량의 25%를 두 일본 기업이 담당하고 있다”며 “새로운 공급업체를 검증하는 데는 12~18개월이 걸리며 새로운 생산 능력을 구축하는 데는 2~3년이 소요된다”고 했다. 

중국에서 시작된 공급망 문제가 일본과 한국, 그리고 한국의 메모리에 의존하는 미국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였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일본산 WF₆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다고 평가한다. SK하이닉스의 경우 국내에 SK스페셜티, 후성(Foosung) 등을 통해 다변화된 공급선을 이미 구축하고 있어 상대적인 유연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SK스페셜티와 후성 모두 WF₆ 생산에 필요한 텅스텐 분말을 결국 중국에서 수입해야 한다는 구조적 한계는 그대로 존재한다. 한국이 일본을 대체하는  WF₆ 공급자가 되더라도, 텅스텐 분말은 여전히 중국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 등에 따르면 주요 공급사들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DB하이텍 등 고객사에 2026년 WF₆ 계약가를 70~90% 인상하겠다고 공식 통보했다. 

물론 긍정적 변수도 없진 않다. 국내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상동광산에서 텅스텐을 생산하려는 움직임이 진행 중이다. 이 광산의 소유주인 캐나다 알몬티 인더스트리스는 2026년 3월 1단계 정식 가동을 선언, 연간 약 64만 톤의 광석을 처리해 텅스텐 농축물 약 2300톤을 생산한다는 목표를 밝혔다. 상동광산에서 나오는 텅스텐 농축물이 반도체용 WF₆ 제조에 필요한 초고순도 텅스텐 분말로 가공되기까지는 추가적인 정제 공정이 필요하다. 

텅스텐을 예로 들었지만, 반도체 제조에는 WF₆ 외에도 네온, 크립톤, 크세논 같은 희귀 가스, 불화수소(HF), 포토레지스트 등 수백 종의 특수 소재가 필요하다. 중국 혹은 특정 국가에 공급이 집중된 핵심 소재를 효과적으로 조달, 활용하기 위한 장기적 계획과 전략이 필요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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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WF₆ 수입 단가 급증 (출처 : SemiAnalysis, 편집=Gemini)

HBM 공동설계·첨단 패키징이 다음 단계

이번 4755조원 투자 발표에는 한국의 강점인 메모리 반도체뿐만 아니라 더 큰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담겨 있다. 충청권 81조원 패키징 허브 투자가 그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직접 언급했듯 HBM은 이제 단순 메모리가 아니라 첨단 패키징 기술이 집약된 복합 제품이기 때문이다. 

현재 HBM은 수직으로 쌓인 메모리 다이를 칩에 미세한 구멍을 뚫는 TSV(실리콘관통전극) 기술로 수직 연결하고, 칩 사이의 간극을 채우기 위한 정밀 열압착(TC) 본딩 공정을 거친다. 

이때 사용하는 세부 본딩 방식에 따라 삼성전자는 TC-NCF 기술을, SK하이닉스는 MR-MUF를 적용하고 있다. 

적층 단수가 16단 이상으로 높아지는 6세대 HBM(HBM4)부터는 한계에 달한 TC 본딩을 대체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본딩(다이렉트 본딩)’ 같은 기술이 주목받는 추세다. 높은 성능을 내기 위해 층수가 높아질수록 HBM이 뜨거워지기 때문에 칩의 구리 기둥 사이에 구리 패드를 넣어 붙여 열 효율을 극대화하는 시도가 진행 중이다. 

접합면 때문에 생기는 저항을 줄여 데이터 전송 속도를 높이는 신기술이지만, 실제 생산 현장의 수율(생산량 중 정상 제품의 비율) 등 대량 양산 단계에 이르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패키징 기술 고도화와 함께 ‘공동설계(co-design)’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 HBM의 스펙은 이제 메모리 업체가 독자적으로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엔비디아,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수요처가 자신들의 가속기 구조에 최적화된 HBM을 요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오픈AI까지 브로드컴과 손잡고 자체 칩 설계에 돌입했다. 

이와 같은 다양한 고객사와 밀접하게 협업하며 그 설계 요건에 맞춰 최적화된 칩을 공동으로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될 것으로 전망된다. 설계 규격을 ‘받아서’ 만드는 수준을 넘어, 차세대 메모리 아키텍처를 고객과 함께 그리는 단계로 올라설 필요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가운데)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오른쪽),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기업 투자계획 발표 후 손을 맞잡고 있다 (출처 : 청와대 사진기자단)

더밀크의 시각: AI 인프라 생태계로의 진화 기회

이번 메가프로젝트의 또 다른 주목할 축은 AI 데이터센터다. 

SK그룹, GS그룹, 네이버가 550조원을 투자해 2035년까지 18.4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한다는 계획은 반도체를 넘어 AI 인프라 생태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AI 가속기에 공급하는 HBM을 지렛대로 삼아 패키징, 더 나아가 AI 가속기가 실제로 작동하는 데이터센터까지 한국 기업들이 구축한다면 강력한 소버린 AI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주목할 점은 메모리 공급난으로 인해 글로벌 빅테크가 SK하이닉스에 공장을 지어주겠다고 제안했다는 사실이다. 메모리 기술력에서 시작된 이 협상력을 활용해 웨이퍼 증설뿐 아니라 공동 데이터센터 운영이나 AI 인프라 파트너십 구조 등으로 확장할 수 있다면 향후 AI 생태계 내에서 경쟁력을 더 높일 수 있다.  

삼성전자 역시 이번 발표에서 구미 지역에 피지컬 AI 및 휴머노이드 로봇, 그룹 내부 AI 데이터센터 개발 계획도 함께 공개하며 더 큰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로봇과 피지컬 AI 생산 라인을 통해 구축하는 현장 데이터는 삼성의 큰 자산이 될 것이다. 

4755조원은 출발점이지, 완성된 답이 아니다. 이번 발표를 계기로 한국 반도체 생태계는 소재 공급망 내재화와 다변화에 나서야 한다. 

WF₆ 위기에서 볼 수 있듯이 메모리 팹의 가동률이 특정 소재 한 품목에 흔들릴 수 있다. 구체적인 내재화 로드맵과 기술 수준 검증을 통해 기회를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 

HBM 공동설계 역량의 확보는 이미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에너지를 쏟고 있는 분야다. 충청권 81조원 패키징 허브를 단순한 후공정 설비 증설이 아닌, 고객과의 공동 개발 플랫폼으로 차별화하고, 팹리스 기업들뿐 아니라 AI 모델 개발사들과도 밀접한 협력에 나서야 한다.  

AI 데이터센터 투자는 한국이 HBM 공급자 역할을 넘어 AI 컴퓨팅 인프라로 생태계를 확장할 기회다. AI 워크로드 최적화, 소프트웨어 스택, 전력 조달 및 에너지 효율 등 실질적인 운영 역량을 동시에 쌓아야 한다.

골드만삭스는 2026년 D램 공급 부족 규모를 전체 수요의 4.9%로 상향 조정하며 “15년 만의 최악”이라고 진단했다. 이 부족이 길어질수록 한국이 공급자로서 쥐는 협상 카드의 가치는 높아진다. 

소재 공급망을 선제적으로 내재화하고, HBM 공동설계자의 자리를 확고히하며 AI 인프라 운영자로 도약하는 것이 이 카드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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