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인재는 왜 SF로 몰리나… EO하우스가 보여준 창업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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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권 2026.05.03 14:32 PDT
AI 시대, 인재는 왜 SF로 몰리나… EO하우스가 보여준 창업의 본질
김태용 EO 대표 (출처 : 더밀크 편집)

[실리콘밸리 이렇게 바뀌었다 ④ ] SF에서 '해커하우스' 만든 김태용 EO 대표
거꾸로 흐르는 중력 : AI는 왜 전 세계 인재를 다시 ‘실리콘밸리’로 불러들이나
"독수리는 낭떠러지에서 자란다"… 한국 창업 생태계 여전히 패스트팔로워 전략과 과도한 지원 구조
글로벌 기준의 문제 설정과 실행력에서 격차가 드러나

"샌프란시스코 미션 디스트릭트의 한 건물. 간판도 없고 웹사이트도 없다. 그런데 이 공간을 거쳐간 창업자들 중에서 와이콤비네이터(YC) 합격팀과 a16z 투자 유치 기업이 계속 나온다. 한국·일본·중국·인도 출신 창업자들이 함께 먹고, 자고, 코딩하고, 투자자를 만난다. 집 안에서 영어 이외의 언어를 쓰면 국적과 나이를 불문하고 즉시 푸시업을 해야 한다는 하우스 룰이 있다. 이것이 EO 해커하우스다.

이 공간을 만든 사람은 김태용(35) EO 대표다. 그는 대학 시절 창업에 실패하고, 2017년 배낭 하나와 350만 원을 들고 무작정 실리콘밸리로 날아간 청년이었다. 창업자들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 영상 시리즈 '리얼밸리'가 EO의 출발점이 됐고, 지금은 한국 최대의 스타트업 미디어로 성장했다. 영어 채널을 빠르게 론칭해 글로벌 구독자를 확보하며 실리콘밸리 현지에서도 인정받는 미디어가 됐다. 기관도 정부도 아닌, 개인의 뚝심 하나로 일군 생태계다. 

샌프란시스코 EO 해커하우스 (출처 : 더밀크 손재권)

팔로알토에서 시작, 샌프란시스코로 : 3년의 실험, 7개월의 도약

"팔로알토에서 샌프란으로 온 건 정말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차이가 엄청 큽니다"

EO 해커하우스의 역사는 3년 전 팔로알토에서 시작됐다. 한국인 최초의 해커하우스라는 타이틀과 함께였다. 그리고 약 7개월 전, 공간을 샌프란시스코로 옮겼다.

이 결정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었다. AI 열풍이 몰고 온 인재와 자본의 흐름이 샌프란시스코로 집중되는 현상을 읽은 선택이었다. 한국 VC인 베이스인베스트먼트와의 파트너십이 이 도전을 뒷받침했다. 김 대표는 베이스인베스트먼트와 함께 올해 1월 '패트리어트 펀드 1호'를 결성하며 미디어 회사를 넘어 투자 파트너로서의 역할까지 겸하게 됐다. 해커하우스 운영비의 상당 부분도 베이스인베스트먼트와 함께 분담한다. 남는 장사는 절대 아니다. 그래도 이 공간을 유지하는 이유가 있다.

독수리를 키우는 것처럼 낭떨어지에서 떨어뜨려야 날 수 있거든요. 그런 환경을 만드는 게 우리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태용, EO 대표
샌프란시스코 EO 해커하우스에서 입주사 직원들이 일을 하고 있다 (출처 : 더밀크 손재권)

'전 세계에서 몰려온다' — AI가 바꾼 실리콘밸리의 중력

현재 EO 해커하우스 거주자의 50~60%는 한국 창업자들이고, 나머지는 일본·중국·인도 출신이다. 김 대표는 1년 반째 한국-일본 창업자 교류 모임을 운영하고 있고, 일본의 대표적인 글로벌 배치 프로그램 '딜라이트 엑스(Delight X)'와도 협력해 선발팀 9명 중 3명이 이 하우스에 머물고 있다. 유학도 잘 안 가기로 유명한 일본에서 대기업들이 직접 인재를 실리콘밸리로 보내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변화다.

이 현상이 AI 때문에 더욱 가속화됐다는 것이 김 대표의 진단이다.

"AI가 너무 빨리 변하다 보니까 젊은 세대나 창업자들이 이 변화의 중심에 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AI 인프라를 감당할 수 있는 투자를 받아서 성장해야 하는데 그걸 할 수 있는 곳이 실리콘밸리입니다"

역설적이게도 AI는 세상을 분산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기술이 되고 있다. 투자, 인재, 인프라 세 가지가 가장 밀집된 곳은 여전히 실리콘밸리이고, 그 중력이 AI 시대에 더욱 강해졌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EO 해커하우스에 입주한 직원들이 함께 모여 업무를 하고 있다 (출처 : 더밀크 손재권)

실리콘밸리와 한국의 진짜 격차

데모데이를 가거나 다른 해커하우스에 놀러 가도 한 10~15%는 하드웨어, 피지컬 AI 하는 팀들이에요. 오픈소스 기반으로 창업하는 팀은 한 30%는 되는 것 같고, 우주 데이터센터, 바이오헬스케어 AI... 한국 창업 경진대회에 가면 이런 회사들 보기가 굉장히 어렵죠.
김태용, EO 대표

수많은 데모데이와 밋업을 돌아다니는 김 대표가 목격하는 실리콘밸리의 풍경은 한국과 사뭇 다르다.

한국 스타트업은 어떻냐고 물었다. AI 아바타, 노트테이킹, 비슷비슷한 컨슈머 서비스가 많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피지컬 AI, 오픈클로 등 지금 실리콘밸리를 지배하는 분야나, 우주 개발 등 딥테크 스타트업이 현저하게 적은 것도 특징이다. 김 대표는 이 격차를 단순한 기술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마인드셋의 차이로 진단했다.

"우리는 패스트 팔로워에 최적화가 돼 있어요. VC한테 투자받을 때도 '중국이나 미국에 비슷한 거 있었냐'고 먼저 물어보죠. 근데 여기서는 세계 표준을 내가 직접 만든다는 인식에서 창업이 시작돼요. 증명된 것을 조합해서 하는 방식이 잘 안 먹히는 곳이에요"

김 대표는 또 "시장에서 증명되면 바로 정책자금이 조성 돼 쫓아가는 구조로 생태계가 짜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극복해내가는게 우리 세대에 해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비가 나온다. 김 대표가 관찰한 일본 창업자들은 이른바 '애국심 창업'에 가깝다. 미국 빅테크가 일본 IT 업계 인재들에게 연봉 3배를 주며 데려가는 현실을 10년 넘게 지켜보다가, "미국에서 세계 표준을 만들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지속 가능하지 않겠다"는 결론에 도달한 창업자들이다.

딜라이트 엑스 데모데이에서 피칭한 9팀 중 3팀이 드론·로봇·로봇 데이터 분야였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 창업자들의 동기는 다소 분산돼 있다. 자기 증명, 유니콘에 대한 야망, 그리고 적지 않은 비중으로 "정부가 티켓 사줘서 등 떠밀려 나온" 케이스도 섞여 있다. 진짜와 노이즈가 뒤섞이는 것이다.

한국의 창업 지원 구조에 대해 그의 시각은 냉정하다. 항공권부터 프로그램 비용, 정책 자금까지 지원하는 한국의 방식이 오히려 창업자의 본질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창업자는 낭떨어지에서 떨어뜨려야 나는 거예요. 근데 한국은 창업자를 너무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만 보는 것 같아요."

반면 중국은 알리바바 창업자들이 자본을 모아 AGI 하우스보다 큰 글로벌 해커하우스를 선전(深圳)에 짓고, 론칭 파티를 알리바바 본사에서 여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글로벌 창업자들이 중국에서도 활동할 수 있도록 판을 까는 것이다. 한국의 접근 방식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장면이다.

김태용 EO 대표 (출처 : 더밀크 손재권)

레퍼럴만으로 돌아가는 공동체…  '진짜와 노이즈를 가린다'

EO 해커하우스에는 해커톤도 없고 공개 이벤트도 없다. 대신 창업자들 간의 밀도 높은 상호작용이 있다. 입주 방식도 독특하다. 오직 레퍼럴, 그리고 첫 한 달간의 검증이다.

"결국 레퍼럴로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나 추천을 잘 안 해요. 자기가 봤을 때 괜찮은 사람을 추천하는 구조예요."

이 구조가 자연스러운 필터링 시스템이 됐다. 이곳을 거쳐간 팀들 중 YC와 a16z 투자를 받은 곳들이 나왔고, 한 팀은 입주 후 미국 매출이 한국을 넘어섰다.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피칭 기술이 아니다. 미국 시장에서 어떻게 고 투 마켓(Go-to-Market)을 실행했는지, 어디서 막혔고 어떻게 뚫었는지의 날 것 그대로의 경험이다.

맨땅에서 시작해, 실리콘밸리에서 인정받다

김태용 대표의 다음 목표는 '아시안 해커하우스'로의 포지셔닝 강화다. 샌프란시스코 공간도 이미 꽉 찼다. 이사를 검토 중이다. EO 미디어의 영어 채널 확장과 해커하우스·펀드의 시너지를 키우며, AI 버블이 꺼지기 전에 시의성 있는 포맷을 계속 개발하겠다는 계획도 함께다.

350만 원을 들고 실리콘밸리에 날아간 청년이 미디어를 만들고, 해커하우스를 운영하고, 벤처펀드의 파트너가 됐다. 스타트업, 창업쪽 미디어로는 구독자 수 기준으로 Y콤비네이터 다음으로 많다. a16z의 미디어 파트너사이기도 하다. 화려한 배경도 든든한 지원도 없이 맨땅에서 일군 생태계다. 그가 보기에 실리콘밸리는 지금 AI로 세상이 뒤집히고 있고, 그 중심으로 전 세계 최고 인재들이 몰려오고 있다.

한국은 그 흐름 안에 제대로 서 있는가? 그 질문이 오늘도 그를 이 공간에 붙잡아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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