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베일 신화’ 실리콘밸리서 재연… 정주영 "해봤어?" 정신 깃든 마루SF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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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익 2025.11.12 19:53 PDT
‘주베일 신화’ 실리콘밸리서 재연… 정주영 "해봤어?" 정신 깃든 마루SF의 꿈
마루SF 개관식 현장 (출처 : 아산나눔재단)

실리콘밸리에 닻 올린 ‘프론티어 기업가정신’... “불가능을 가능으로”
왜 지금, 왜 실리콘밸리인가… 정남이 상임이사 “AI가 모든 산업 재편”
핵심 차별점은 주거 지원... 막대한 초기 비용 절약 효과
신뢰 기반의 선별된 커뮤니티… 와들, 오픈AI 해커톤 1위·앳, YC 선발
더밀크의 시각: 글로벌 시장, 할 수 있다는 믿음을 키워라

한 사람의 도전이 하나의 기업, 산업, 한 나라의 미래를 바꿨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업가 정신의 힘입니다.
정몽준 아산나눔재단 명예이사장

1970년대 중반 세계는 오일 쇼크로 신음하고 있었다. 이 험난한 시기, 현대건설은 ‘20세기 최대 역사’라 불리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계약을 따내며 중동 건설 붐을 일으켰다. 공사금액 9억3000만달러. 당시 환율로 대한민국 국가 예산 4분의 1에 달했던 거대한 규모의 도전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정몽준 아산나눔재단 명예이사장은 “당시 현대건설은 대규모 해외 프로젝트 경험도, 자본도 부족했다. 경쟁자는 유럽의 거대 건설사들이었다”며 “많은 이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도전을 선택했다”고 회고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 울산 조선소에서 거대한 철골 구조물을 제작해 바지선으로 페르시아만까지 운송하는 방식으로 결국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것. 

정 명예이사장은 12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마테오에서 진행된 마루SF(MARU SF) 개관 행사 축사에서 “이 성공은 한국 기업도 세계 무대에서 해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우리 기업에 자신감을 불어넣었고, 글로벌 진출에 문을 열었다”며 아버지 정주영 창업주의 일화를 꺼냈다. 

40여 년 전, 페르시아만에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꿨던 그 ‘프론티어 기업가정신’이 글로벌 혁신의 심장부인 실리콘밸리에서 마루SF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닻을 올렸다는 선언이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건설 현장을 둘러보며 현황을 점검하는 모습. (출처 : 아산정주영닷컴, 편집=Gemini)

실리콘밸리에 닻 올린 ‘프론티어 기업가정신’... “불가능을 가능으로”

아산나눔재단이 이날 공식 개관한 마루SF는 스타트업을 위한 단기 체류형 글로벌 커뮤니티다. 오랜 기간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를 지원해온 아산나눔재단이 첫 해외 거점을 마련한 것. 단순한 물리적 공간 오픈을 넘어 정주영 창업주의 철학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정 명예이사장이 축사에서 주베일 신화가 자본이나 경험이 아닌 사람의 용기로 실현됐음을 강조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마루SF의 존재 이유 역시 창업가(사람)에 있다는 뜻에서다. 

정 명예이사장은 “‘사회 발전에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람이다. 자본, 자원, 기술은 그다음이다’라는 정주영 창업주의 말을 인용하며 현장에 모인 창업가들에게 “여러분이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고 독려했다. 

그는 이어 “마루SF는 그 도전을 위한 기반"이라며 “이곳에서 창업가들은 세계적 멘토를 만나고 동료들과 협력하며 글로벌 시장 기회를 잡을 것으로 믿는다. 여기 모인 창업가 여러분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시길 바란다. 아산나눔재단은 여러분의 도전과 성장을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날 개관식에는 정몽준 명예이사장을 비롯해 엄윤미 이사장, 정남이 상임이사를 포함한 재단 이사진, 임정택 주샌프란시스코 총영사, 국내외 투자자 및 창업가 등 약 100여 명의 창업생태계 관계자가 참석했다.

임 총영사는 “마루SF는 한-미 창업생태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할 것”이라며 “한국 스타트업들이 실리콘밸리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총영사관 차원에서도 적극 지원하겠다”고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마테오에서 진행된 마루SF(MARU SF) 개관 행사 현장. 100여 명의 창업 생태계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정남이 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가 발표하고 있다. (출처 : 더밀크 박원익)

왜 지금, 왜 실리콘밸리인가… 정남이 상임이사 “AI가 모든 산업 재편”

아산나눔재단은 마루SF를 왜 지금, 실리콘밸리에 설립했을까. 정남이 상임이사는 마루SF 개관 발표에서 그 배경을 “AI가 모든 산업을 재편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는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서울은 2025년 글로벌 스타트업 생태계 순위에서 세계 8위에 올랐고, 약 20개의 유니콘 기업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제는 질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게 정 상임이사의 진단이다. 

정 상임이사는 AI 시대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애플,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기술기업들이 설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2025년 기준 이들 미국 상위 10개 기술기업의 시가총액 합계는 약 20조달러로, 유럽과 중국 상위 10개 기업의 총합의 3배가 넘는다. 

정 상임이사는 “글로벌 기준을 미국이 설정하는 시대에 미국 시장과 직접 연결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어렵다”며 “글로벌 혁신의 중심지에 마루SF를 세운 이유”라고 밝혔다. 

국내에서 성공 후 해외로 진출하는 방식을 넘어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하는 창업팀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돕는다는 목표다. 

정 상임이사는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한국을 ‘피지컬 AI(Physical AI)’ 시대를 선도할 잠재력을 갖춘 나라로 평가했다”고 언급하며 “세계 최상위권의 고등교육 이수율과 유능하고 근면한 인재 풀이 한국의 최대 강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이어 “누군가 저에게 ‘왜 한국 스타트업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늘 ‘사람’이라고 답한다”며 “이 열정과 에너지가 한국의 성장을 이끌었고, 이제 그 힘이 글로벌 무대에서도 발휘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마루SF 생활공간(본동) (출처 : 더밀크 박원익)

핵심 차별점은 주거 지원... 막대한 초기 비용 절약 효과

마루SF의 가장 큰 차별점이자 실질적인 가치는 창업자, 스타트업에 주거를 지원한다는 점이다. 

이미 서울에서 스타트업 지원 공간인 마루180(2014년 오픈), 마루360(2021년 오픈)을 운영하며 ‘일하는 공간’의 혁신을 이끌어왔던 경험을 살려 단순한 공유 오피스가 아닌 주거까지 해결해 주는 종합 공간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이는 실리콘밸리에 진출하려는 스타트업들의 가장 큰 고충을 정면으로 해결하기 위한 전략이다. 높은 물가와 주거 비용, 적당한 입지를 찾고 적응하는 데 드는 시간은 초기 스타트업에게 치명적인 걸림돌이 돼왔기 때문이다. 

정몽준 명예이사장은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에서 “여기 스타트업들이 오면은 처음에 자리 잡을 때 고생을 많이 하는데 마루SF가 랜딩(초기 정착)을 잘 도와줄 수 있다”며 “랜딩이 잘 되면 그다음 단계는 훨씬 더 잘 풀어갈 수 있다. 이게 아주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마루SF는 최대 30명이 동시에 체류할 수 있는 생활공간(본동, 별동)과 커뮤니티 시설을 갖췄다. 멤버로 선발된 스타트업은 2년의 멤버십 기간 동안 연간 최대 16주까지, 한 번 체류 시 최소 2주에서 최대 6주까지 원하는 기간을 선택해 마루SF를 이용할 수 있다. 

창업자가 현지 주거 문제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오롯이 ‘일, 고객 미팅, 현지 생태계 연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이다.

아산나눔재단 이사진이 테이프 커팅식을 진행하고 있다. (출처 : 더밀크 박원익)

신뢰 기반의 선별된 커뮤니티… 와들, 오픈AI 해커톤 1위·앳, YC 선발

마루SF 멤버십 선발은 파트너 기관의 ‘추천’과 재단의 깐깐한 심사를 거쳐 진행된다. 

정남이 상임이사는 추천 방식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마루SF는 단순히 일하는 공간이 아니라 사는 공간이기 때문”이라며 “함께 생활할 팀을 선발하기 위해서는 팀을 실제로 경험한 기관의 추천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소중한 입주 기회를 낭비하지 않도록 입주 지원팀의 실력과 시너지 효과를 담보하는 강력한 필터 역할을 하는 셈.

19개 ‘멤버십 파트너’로 구성된 마루SF 생태계에는 500글로벌, 더벤처스, 스파크랩 등 국내외 주요 VC와 액셀러레이터, 그리고 구글 포 스타트업, AWS 같은 빅테크도 포함된다. 

이들은 스타트업을 추천하고 내가 받은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는 ‘Pay-it-forward’ 정신으로 후배 스타트업을 돕는다. 

벤처 파트너는 인사이트 아워(Insight Hour), 피칭 프로그램(Pitching Program) 등을 직접 운영하며 실질적인 노하우와 네트워크를 제공한다. 공간 운영 파트너인 빌드블록은 부지 선정부터 설계, 시공, 일상 관리까지 공간 전반을 총괄, 독특한 스타트업 캠퍼스를 완성했다.  

마루SF는 이미 지난 5월부터 6개월간의 시범운영을 통해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 기간 총 53개의 멤버십 스타트업이 마루SF를 이용하며 피드백을 제공, 프로그램을 최적화한 것이다. 

소기의 성과도 거뒀다. 시범 운영 기간에 마루SF에 합류한 와들의 조용원 COO는 “지난 8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오픈AI GPT-5 해커톤에서 전 세계 93개팀과 경쟁해 1위를 차지했다”며 “글로벌 진출의 본격적인 첫 순간에 마루SF가 함께 했다”고 했다. 

김효준 앳(at) 대표 역시 “와이콤비네이터(YC) 선발과 프리시드 투자 유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마루SF에서의 경험이 실리콘밸리 현지 네트워크 구축과 비즈니스 확장에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조용원 와들 COO가 발표하고 있다. (출처 : 더밀크 박원익)

더밀크의 시각: 글로벌 시장, 할 수 있다는 믿음을 키워라

마루SF의 개관은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 차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정부, 공공기관 중심의 지원기관이 아닌 민간이 주도하는 움직임이라는 점, 일회성 프로젝트가 아닌 오랜 기간 스타트업 생태계를 지원해온 노하우와 트랙 레코드(track record, 실적)'가 뒷받침 된다는 점에서다. 

행사에 참여한 임정욱 전 중소벤처기업부 창업벤처혁신실장은 “스타트업들이 동시에 일과 숙박을 할 수 있는 멋진 공간을 만들었다”며 “민간에서 유연한 발상을 통해 정말 스타트업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낸다”고 했다.   

엄윤미 아산나눔재단 이사장은 “마루SF는 한국과 미국의 창업생태계를 연결하는 핵심 인프라로 ‘프론티어 기업가정신’을 실현하는 글로벌 커뮤니티 허브가 될 것”이라고 했다. 

1965년 국내에 고속도로 하나 없던 시절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 해외로 나간 현대의 첫걸음처럼 AI 시대 한국 스타트업들 역시 두려움을 극복하고 세계로 나가는 큰 꿈을 가질 필요가 있다.

결국 마루SF의 핵심은 공간이 아니라 정신이다. 자본, 기술이 아닌 사람이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는 정주영의 철학, 그리고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용기가 실리콘밸리 중심에서 다시 한번 증명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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