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일잘러는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일을 지휘한다
[일잘러 페스타 2026] 손재권 더밀크 대표 강연
AI는 일을 없애지 않았다… '업무의 원자화' 시작
일잘러의 재정의: 속도가 아니라 설계다
AI를 잘 쓰는 사람의 조건… '오케스트레이터'의 다섯 가지 역량?
"AI가 가장 먼저 없앨 직업 1순위는 영상의학과 전문의다"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 교수가 지난 2016년 토론토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당장 영상의학과 전문의 양성을 멈춰야 한다"며 "5년 안에 딥러닝이 영상의학과 의사보다 잘하게 될 것이 완전히 자명하다"고 해서 유명해진 말이다.
지난 2일 서울 코엑스 마곡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일잘러 페스타 2026'에서 손재권 더밀크 대표는 이 예측이 틀렸다고 말했다. 그는 젠슨 황 엔비디아 CEO의 설명을 인용하며 "영상의학과 의사의 수는 오히려 늘어났다"고 말했다. AI 도입으로 판독 생산성이 크게 높아지자 검사 건수가 증가했고, 이는 병원 수익 확대와 추가 채용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 2016년 이후 메이요 클리닉의 영상의학과 인력은 오히려 55% 늘어 400명이 됐고 미국영상의학회는 향후 30년간 해당 전문의 공급이 26%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금은 '대체'는커녕 역대 최대 규모의 영상의학과 전문의 부족 사태를 겪고 있다.
손 대표는 이를 젠슨 황의 표현을 빌려 "더 나은 경제성(Better economics)이 더 많은 채용(More hiring)을 만든다"고 소개했다.
이 사례는 강연의 핵심 메시지였다. 손 대표는 "AI는 직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직업의 정의를 바꾸고 있다"고 설명했다. 생긴다 없앤다라는 '흑백 사고'에 본질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사의 본질적인 역할은 이미지를 판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진단하고 환자를 치료하는 데 있다.
AI가 대신한 것은 업무(Task)였을 뿐, 일의 목적(Purpose)은 여전히 인간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는 설명이다.
[핵심 요약 읽기]
AI가 영상의학과 전문의 같은 직업을 없앨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실제로는 판독이라는 기능만 AI에 흡수되고 진단·치료라는 목적은 인간에게 남으면서 해당 직군의 채용은 오히려 늘었다.
업무는 거대한 덩어리에서 AI에게 위임 가능한 '실행의 원자' 단위로 쪼개지고, 그 결과 조직이 원하는 인재상도 실행 속도가 빠른 사람에서 업무를 설계하고 AI 결과를 검증·책임지는 '오케스트레이터'로 바뀌고 있다.
전문화된 일자리의 임금 상승률이 민주화된 일자리보다 42% 높다는 데이터가 보여주듯, AI 시대의 차별화 요소는 인간이 어떤 판단력과 책임감을 갖추느냐에 달려 있다.
AI는 일을 없애지 않았다… '업무의 원자화'가 시작됐다
강연의 두 번째 주제는 AI가 '일의 단위' 자체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에 맞춰졌다.
손재권 더밀크 대표는 과거의 업무를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설명했다. 기획부터 자료 조사, 초안 작성, 반론 검토, 리스크 점검까지 모든 과정을 한 사람이 순차적으로 수행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이 거대한 업무가 잘게 분해된다. 자료 검색, 핵심 요약, 표와 초안 작성, 반론 생성, 리스크 점검 등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작은 실행 단위로 나뉜다. 손 대표는 이를 '실행의 원자(Atoms of Work)'라고 표현했다. 이렇게 원자화된 업무는 AI 에이전트에게 개별적으로 맡길 수 있으며, 인간은 이를 조율하고 통합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그는 "기계적인 생성과 데이터 처리는 더 이상 인간의 몫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손 대표는 이러한 변화가 세 가지 방향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첫째는 기술의 보편화다. 코딩이 과거의 문해력처럼 누구나 활용하는 기본 역량으로 자리 잡는다. 둘째는 구조의 재설계다. AI를 중심으로 업무 아키텍처가 다시 짜이면서 생산성이 크게 높아진다. 셋째는 생태계의 확장이다. AI 덕분에 창업 비용과 진입장벽이 낮아지면서 새로운 스타트업이 빠르게 늘어난다. 손 대표는 이를 "도구가 바뀌는 수준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 자체가 다시 설계되는 변화"라고 설명했다.
노동시장 역시 두 갈래로 재편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AI로 인해 일자리가 민주화되고 있어 AI 도구를 활용하면 비전문가도 비교적 쉽게 수행할 수 있게 됐다. 진입장벽은 낮지만 성장 속도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반대편에는 '전문화된 일자리(Professionalized Jobs)'가 있다. AI를 활용하면서도 더 높은 수준의 판단력과 문제 정의 능력, 공감 능력, 리더십 등 인간 고유의 역량이 요구되는 직무다.
손 대표가 업워크의 자료를 인용, 제시한 데이터에 따르면 전문화된 일자리는 민주화된 일자리보다 성장 속도가 약 두 배 빠르고, 2021년 이후 임금 상승률도 42% 더 높았다.
그는 이를 "AI와 인간의 관계는 제로섬이 아니라 확장되고 있다"고 정리했다. AI가 실행을 더 많이 맡을수록 인간은 방향을 결정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주도성(Agency)을 더욱 크게 발휘하게 된다는 의미다.
연공서열의 압축, 이력서의 종말
AI 시대가 되면 조직 내부 구조에도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손 대표가 제시한 수치는 두 가지다.
업워크의 자료에 따르면 주니어 직무가 전통적으로 시니어에게 요구되던 리더십·전략적 사고 역량을 요구할 확률이 7배 증가했고, 시니어급 역량을 요구하는 신입·주니어 일자리 자체도 35% 이상 폭발적으로 늘었다.
사원-대리-과장으로 이어지던 선형적 성장 모델은 사실상 종료됐다는 것이 진단이다. 그는 "복잡한 의사결정을 입사 1년 차부터 수행해야 한다면, 조직의 온보딩과 멘토링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청중에게 던졌다.
같은 맥락에서 '직함(Job Title)'의 효용도 흔들리고 있다. 과거에는 직함 자체가 조직 내 위치를 규정했고, 이력서상의 경력은 추측과 학벌·간판에 의존하는 불투명한 신호였다.
손 대표는 "이제 이력서의 직함은 의미를 잃는다"며, 그 자리를 '구체적인 작업 결과물'이 대체한다고 봤다. 어디서 일했는가보다 무엇을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어떤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는가가 평가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오직 자신만이 낼 수 있는 지문(Fingerprint)"이라 표현하며,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호기심과 회복탄력성을 결과물로 증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잘러의 재정의: 속도가 아니라 설계다.
그렇다면 조직이 원하는 인재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손 대표는 기존의 '일잘러' 기준인 '빠르고, 성실하고, 보고를 잘하는 사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누가 더 빨리 처리하는가'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대신 누가 일을 다시 설계하는지, 누가 AI를 활용해 더 큰 결과를 만들어내는지가 '일잘러'의 기준이 된다고 강조했다.
이 변화는 인재 평가 기준 자체를 바꾼다. 이제는 업무를 재설계하는 능력과 AI를 활용해 여러 작업을 동시에 조율하는 역량이 더 중요해진다. "무엇을 새롭게 설계할까"가 핵심 가치가 된다. 그 결과 한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성과의 규모 역시 개인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 AI와 협업하는 수준으로 확장된다.
이는 조직 구조의 변화로도 이어지고 있다. 산업화 시대의 일이 업무(Task)-프로세스(Process)-산출물(Output)의 피라미드 구조였다면, AI 시대의 일은 한 명의 '마에스트로(Maestro)'가 다수의 AI 에이전트를 지휘하는 원형 구조로 바뀐다는 설명이다. 단순 반복 작업은 소멸하고 통찰(Insight)이 부상하며, 성과를 가르는 것은 실행 속도가 아니라 목적의 깊이라는 설명이다.
AI가 실행을 대체한다면, 인간에게 남는 일은 무엇인가.
손 대표는 인간이 '실행자'에서 '오케스트레이터'로 진화한다고 답했다.
이 역할은 무엇을 맡길지 정하는 위임, 결과가 맞는지 확인하는 검증, 상황에 맞게 고치는 맥락화, 결론을 내리는 최종 판단으로 구성된다. "AI는 압도적인 속도로 결과물을 쏟아내지만, 품질의 최종 관문은 오직 사람만이 통과시킬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역할을 갖췄는지는 네 가지 질문으로 가늠할 수 있다고 손 대표는 말했다. 업무를 AI에게 맡길 수 있는 단위로 쪼갤 수 있는가, 문맥과 제약과 명확성을 갖춘 좋은 지시를 만들 수 있는가, AI 결과물의 최종 퀄리티를 판단할 자신만의 검증 기준을 갖고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확보한 개인 생산성을 팀의 성과로 연결하고 있는가다.
그는 특히 마지막 질문을 강조하면서 "오케스트레이터의 가치는 혼자만의 비밀 무기에 머무르지 않고, 조직 전체의 집단 지성을 끌어올리는 데 있다"고 말했다.
AI를 잘 쓰는 사람의 조건… '오케스트레이터'의 다섯 가지 역량
손 대표는 개인과 조직이 취해야 할 성장 전략을 두 갈래로 제시했다.
하나는 '목표의 재설계'다. "무엇을 달성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이 과정에서 어떤 역량을 확보할 것인가"로 바꾸고, 실패보다 시도하지 않았을 때의 도태를 더 큰 리스크로 평가하는 심리적 안전감을 조직이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AI 도구를 실험하며 자신만의 '워크플로우'를 만드는 시간 자체를 핵심 성과로 인정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다른 하나는 '맥락의 큐레이션'이다. 조직의 비전, 고객의 미묘한 감정처럼 AI가 읽어내지 못하는 '딥 데이터'를 계속 공급하고, 서로 다른 지식이 부딪히고 섞이는 사내 접점을 의도적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을 압축한 것이 '오비탈 협업 모델'이다. 인간이 태양계 중심에서 중력과 방향을 제공하고, AI는 검색·초안·점검을 맡아 그 궤도를 초고속으로 돈다.
강연은 결국 인간의 문제로 마무리됐다. 손 대표는 "모두가 최고 수준의 AI 모델과 연산력을 동일하게 갖게 되는 시대가 온다"며, 그때 유일한 차별점은 "기계를 다루는 인간의 깊이"라고 말했다.
"AI 시대, 우리는 어떤 인간으로 성장할 것인가."
강연은 오케스트레이터가 갖춰야 할 다섯 가지 역량인 해체, 지시, 검증, 자동화, 확장을 제시하며 마무리됐다. 손 대표는 "일잘러의 정의는 완전히 바뀌었다. 이 다섯 노드를 연결하는 사람만이 AI 시대의 복잡성을 통제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