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뷰티는 어떻게 미국서 프랑스 넘어 1위 수입 국가가 됐나?
[기고] 미미박스 하형석 대표
올 여름 미국 굴지의 화장품 유통매장 '울타뷰티'와 두번째 협업 브랜드 탄생.. 미국서 더 적극적
미국 투자자들, AI에 관심있어 하지만 한국 관련은 K뷰티에 큰 관심 보여
미국서 K뷰티 인기는 마케팅 아닌 시스템이 정착됐기 때문
K-뷰티판 LVMH의 탄생도 머지 않아
“우리 임원진과 함께 K팝 공연을 가는 것은 어떠세요?”
지난달 미국의 화장품 체인 매장 울타뷰티(Ulta) 임원진들에게 이 제안을 받았을 때 깜짝 놀랐다. 미미박스는 올 여름 두번째 브랜드를 ‘울타’에 론칭할 예정인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울타 임원진과 LA의 인플루언서들과 함께 오는 7월 열리는 블랙핑크 콘서트를 가자고 한 것. 울타 임원진은 “K뷰티 브랜드의 론칭을 K팝 공연과 함께 기념할 수 있어서 무척 기대된다”고 전했다. 울타 임원진은 본사가 있는 시카고에서 LA까지 자체 비용으로 비행기를 타고 방문할 예정이다.
이런 제안을 받으며 “정말 상전벽해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울타가 관리하는 브랜드 중에서도 작은 기업에 속하는 미미박스의 브랜드 론칭을 기념하기 위해 시카고에서 LA까지 날아와 K-뷰티와 K-팝을 동시에 경험하겠다는 그들의 열정을 보며, 정말 세상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13년 전 미미박스를 창업할 때만 해도 뷰티는 미국 리테일러 뿐 아니라 투자자들에게도 찬밥 신세였다. 문전박대당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테크 투자자들까지 뷰티에 몰려들고 있다. 한국에서는 만나는 투자자들 마다 '뷰티' 얘기를 하고 미국에서는 'AI' 얘기를 한다. 이 두 현상을 보며 나는 확신한다. 미국에 AI가 있다면 한국에는 뷰티가 있다는 것이다.
K뷰티의 진정한 힘은 마케팅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K뷰티가 미국에서 프랑스를 제치고 1위 수입 국가가 되는 등 성공할 수 있었나요?”라고 묻는다. 혹자는 그 이유를 SNS 마케팅을 잘해서라고 분석한다.
아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K뷰티 산업의 독특한 ‘파이낸스 시스템( 현금 흐름 구조)이 K뷰티를 더욱 강하게 만든 본질이다.
이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해보자. 미미박스와 같은 브랜드는 OEM/ODM 업체에는 30-90일 후에 대금을 지급해도 된다. 반면 총판 유통사는 제품을 사간 후 5-20일 안에 현금으로 정산해준다.
이 시간 차이가 마법을 만들었다. 브랜드는 아직 제조비를 지급하기 전에 이미 판매 대금을 받는다. 그 돈으로 바로 마케팅을 한다. 느리게 지급하고, 빠르게 회수해서, 그 차액으로 마케팅을 돌리는 구조다.
아마존이나 쿠팡이 적자를 내면서도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와 같다. 현금 전환 주기 관리의 힘이다. "마케팅을 잘해서 돈을 번 게 아니라, 돈이 돌 수 있는 구조가 있었기에 마케팅을 잘할 수 있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이런 현금 흐름이 가능한 건 한국만의 독특한 인프라 때문이다. 세 개의 축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첫 번째는 생산이다. 코스맥스와 한국콜마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OEM/ODM 업체들이 있다. 올해 1분기에만 각각 15%, 14% 성장했다. 이들은 단순한 생산 파트너가 아니다. 브랜드와 함께 혁신 제품을 개발하는 R&D 허브 역할을 한다. 미미박스가 작은 회사였을 때도 코스맥스 회장님이 직접 만나주셨다. "대표님 같은 청년분들에게 투자해야죠"라고 하시더라. 이제 막 시작하는 브랜드도 적극 지원하는 문화가 있다.
두 번째는 유통이다. 특히 '총판' 시스템이 핵심이다. 실리콘투가 대표적이다. 올해 1분기 63% 성장해서 연매출 1조원이 예상된다. 이 회사 덕분에 브랜드들은 별도의 해외 영업 조직 없이도 글로벌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 10년 전만 해도 브랜드들은 국내 매출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브랜드 초기 단계부터 글로벌 매출이 가능하다. 실리콘투 대표님은 "브랜드가 잘 되어야 저희도 잘 됩니다!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카톡 주세요"라고 하신다. 실제로 2024년부터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세 번째는 리테일이다. 올리브영이 게임 체인저다. 1분기에 14% 성장했다. 이제 단순한 드럭스토어가 아니다. 브랜드가 고객 반응을 검증하고 성장 발판을 마련하는 '글로벌 쇼케이스'다. 한국 방문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쇼핑 장소 중 하나다. 이미 글로벌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 2025-2026년 미국 진출까지 예정되어 있으니 더 커질 것이다.
이 세 축 모두 조 단위 매출을 기록하며 14% 이상 성장하고 있다. 브랜드들은 마케팅과 브랜딩에만 집중하면 된다. 생산은 OEM/ODM이, 유통은 총판이, 고객 접점은 리테일러가 담당하는 효율적인 시스템이 완성됐다.
그래서 미국내 K뷰티의 인기가 '반짝'이 아니라는 것이다. 탄탄하고 경쟁력 있는 가격의 생산-유통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지속가능성을 확보했다.
인재의 힘이 전성기를 만든다
최근 서울 주요 대학을 방문했을 때 인상 깊은 말을 들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AI를 하고, 돈을 벌고 싶으면 뷰티를 한다." K-뷰티가 억 단위 매출과 조 단위 기업을 꿈꿀 수 있는 산업이 됐다는 뜻이다.
요즘 미미박스 신입사원 이력서를 보면 놀랍다. 세대가 지나며 전반적인 인재 수준이 높아진 것도 있지만, 이런 인재들이 뷰티 산업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커리어를 시작하려는 게 인상 깊다. 서울 오피스에서 신입 포지션을 열면 200건 이상의 수준 높은 이력서가 들어온다.
아누아, 달바 등 최근 빠르게 성장하는 브랜드들도 우수한 창업자와 팀들이 본격적으로 뛰어든 결과다. 실리콘밸리처럼 인재가 몰리기 시작하면 산업은 시스템화되고 큰 성공들이 연속으로 나타난다. K-뷰티는 지금 바로 그 출발점에 서 있다.
K뷰티의 전성기는 이제 시작일뿐
2017년 9,000개였던 한국 뷰티 브랜드 수가 2024년 4만3000개로 급증했다. 이제 단일 브랜드의 성공이 아니라 수많은 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나의 '챔피언'이 아닌 여러 유니콘과 글로벌 브랜드들이 등장할 것이다. K-뷰티판 LVMH의 탄생도 멀지 않았다.
K-뷰티는 이제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 한국이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정교하고 완성도 높은 산업 시스템으로 진화했다. 가끔 '미미박스를 조금 늦게 창업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지금 이 산업이 꽃피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K뷰티의 지속가능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이제부터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형석 대표는 누구?
미미박스의 하형석 대표는 환경공학과 패션을 전공한 후 톰포드(Tom Ford)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티몬 초기 멤버로 근무한 뒤 미미박스를 창업했다.
2012년 “K-Beauty의 세계화”를 비전으로 창업해 현재 13년째 회사를 운영 중이다. 미미박스와 하형석 대표는 Y Combinator로부터 투자를 받은 최초의 한국 기업이자 한국인 창업자로, 이후 실리콘밸리에서 시리즈 D 라운드까지 성공적으로 진행하며 총 2억 달러 이상의 벤처 투자를 유치했다.